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자연· 삶· 예술의 어우러짐을 이곳 매물도에서 느끼자! 빛과 바람의 섬! 매물도


소매물도

남해의 보물, 연간 40만이 찾는 관광 명소지!
TV나 잡지를 통해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매력을 가진  볼수록 빠져드는 섬  소매물도~
등대섬뿐만 아니라 일출이 환상적인 폭풍의 언덕, 옛 학교 부지를 따라 걷는 아름다운 산책길,
밤에 보는 등대불빛까지 낭만, 로망, 여유로움 가득한 물빛 고운 섬 소매물도!

역사와 전통

정착, 이주의 역사(정착사, 이주의 계기)

“옛날에 다른 전설 이야기는 여기는. 역사가 소 매물도나 매물도가 왜 매물도냐 하면 매물도 매물도 매물도 라는 게. 역사가 여기 처음에 와서 개간을 하고 처음에 이름이 붙여진 게 메밀 섬이라. 메밀 섬. 표준어로 하면 메밀인데 우리 경상도 사투리로 하면 매물 매물 매물 메밀이 아니고 매물 매물. 첨에 사람이 들어와서 개간을 해가지고 밭에 심은 곡식이 메밀이었어. 메밀꽃이 피면 하얗게 핀다고. 목화도 하얗게 핀다고. 목화도 많이 심구고 여기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목화, 메밀을 많이 심었어. 메밀묵 해먹는다고. 목화는 솜틀해가지고 솜 해가지고 한다고 명주 명 옷 입는다고.” (김재권)

“내가 어릴 때도 목화를 많이 심고 메밀을 많이 심었어. 그래서 옛날 사람들이 저 바깥사람들이 보면 메밀꽃이라고 메밀만 많이 심는 섬이라고 매물이 됐고. 그래가지고 매물도가 됐다고. 옛날에는 메밀인데 우리는 매물이라고 한다고 매물 매물 말 그대로 매물섬이라. 메밀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고 매물섬이라 그래. 표준어는 메밀인데. 우리 경상도 사투리로 매물이라 그래서 매물도라 그래.” (김재권)

“우리 증조부도 여기 살았어. 증조부도 여기 살다 돌아가셔서 산소가 여기 있어. 너무 어려웠어. 처음에는 여기 사람들이 들어와서 바다에 나가서 고기나 잡아서 먹고 터전을 마련할라고 애를 써도 태풍이 오면 전부 황폐화되고 바람 불면 황폐화되고 진짜 농사짓기 힘들고 진짜 어려웠어. 옛날에는 어업도 하고 농사도 많이 있었어.”

“지금은 농사가 잘 안되니까 어업에 종사 한다고 전무 묵혀서 그렇지 옛날에는 전부 밭이었어. 산에 지금도 나무가 울창해지니까 그런데 옛날에는 밭이 엄청 많았어. 식구가 많으니까 한집에 보통 대가족이 살았어. 할머니 할아버지 삼촌 고모 또 뭐 아버지 어머니 있지만 우리 형제간 있으니까 한 집에 대가족이 보통 십 이명 십 삼명.. 그러니까 방마다 사람이 가뜩가뜩 차가 살았어. 가지가지 소도 키우고 염소도 키우고 바다에 가서 낚시도 하고 멸치도 잡고 또 뭐 그물도 해가 고기도 잡고 이래 살았어 그래 살았는데.”

쿠크다스cf로 유명한 소매물도, 파랑주의보, 남자,태어나다 많은 영화의 배경이 된 소매물도는 아름다운 풍광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있다. 대매물도와 비슷한 시기에 사람들이 들어왔고, 의식주를 해결하는 방법에서부터 장례풍습. 결혼 등 생활모습들이 대항, 당금마을과 유사하다. 이는 두 섬 사이에 자연적인 교류를 통해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면서 삶의 모습들이 비슷해 진 걸로 보여진다.

마을의 형성, 변천사(성씨 촌, 인척 관계, 마을의 옛 모습, 지금의 모습. 독특한 풍습, 전설)

“아니 임씨 .옥씨. 김씨 이래 살다가 처음에 이래 와서 저위에 학교터에 앞에보면 밭이 참 좋아 거기 옥씨가 살았어. 거기 학교터 쪽에 그럼 그쪽부터 마을이 제일 먼저 생겨가. 예예 그래가 생겨가지고 처음에 살기는 등대보이는 쪽에 집터가 있었어요.거기도 집이 세 가구가 살았어요. 철거를 해 넘어 와가지고 이쪽으로 와서 정착을 했는데 강씨도 오고 배씨도 오고 한씨도 오고 또. 이래 살았어요. 각성받이가 살았어요. 역사는 지금으로부터 백한 칠십년 가까이 됐다고 보면 돼요.”

“이백년 가까이. 백 한 칠팔십년 안됐나. 그때만 해도 우리 어릴 때는 임씨나 옥씨는 여기 살기는 살았어도 시조들이 살다가 갔다 카는 얘기만 들었지 보지는 못했거든. 처음에 오기는 유배지가 아니고 귀양 와서 유배 되서 온 시초가 그런 건 아니라고 이런 작은 섬에는 대 매물도에는 모르지만 여긴 안 왔다고 봐야지.”

“여기는 사람이 적게 살다 보니까 큰 섬 대 매물도 저쪽에는 사람도 많이 산다고 괄시도 많이 받고 우리는 여서. 예 여기 사람들한테 바당도 다 뺐기고 생활권도 다 뺐기고 어촌계도 자기들이 다 해먹고 우리는 쪼끔만 남겨주고. 지금은 분할이 돼가지고 소 매물도는 소 매물도 전체가 하고 대 매물도는 대 매물도가 하고 그런데. 그런 구역싸움도 어려움이 참 많았어요. 저기는 사람이 많이 살고 여기는 사람이 많이 안사니까 .”

“나 시집올 때 있었어. 여기 바로 내려가면 쓰레기 같은 나무 같은 거 모아놓은데 서지가 있었어. 서당이. 우리 저 조카딸도 배우고 접장 데리고 와서 아들 그때 한문공부하고. 오래됐다. 시집올 때 학교가 있더라고 서당 있더라고. 우리 아저씨가 올해 살아있으면 나이가 팔십 다섯이거든 내가 팔십 서이고. 그 나이또래가 공부를 하더라고. 그때는 한문 공부, 학교가 없어서.”

“1970년대까지는 한 이 백 명 거의 살았어. 칠십 년대는 그렇게 안 살아도 육십년대까지는 그렇게 살았네. 칠십 년대 이후부터는 대가족이 소가족으로 바뀌고 육십 년만 해도 진짜 어려워가지고 대가족이 다 살았거든. 우리 열 몇 살 때는 전부 할아버지 다 같이 살았는데 칠십 년대 들어서는 조금 가족이 바뀌면서 나가고 한 채 한 채 불려나간 게 서른여섯 가구가 살았는데. 그때는 학생 수도 상당히 많았어.”

“오륙도도 대 매물도에서 보면은 다섯 개 같이 보여. 딱 딱 떨어져가지고. 그래서 여기서 보면은 얼굴처럼 보인다고 해가지고 사람 얼굴. 바위마다가 사람 얼굴이 하나씩 박혀 있어요. 원래가 나무가 없는 섬은 섬이 아니에요. 그래서 무슨 도라고 못 붙여. 그니까 나무가 없으면은 우리가 물 밑에 보일랑말랑하는 거 여라고 하는데, 사실 저거는 여거든. 큰 여라고 보면 되는데. 여기서는 이 오륙도가 예전부터 삼여도라고 했거든. 그래서 거기에 대충 얼핏 들은 이야기가 그래. 제주도로 가면 여자 3명이 가다가다 지쳐가지고 망부석이 됐다,” (이석재)

깊은 역사를 가진 등대섬

“등대섬은 일제시대 때부터 있었죠. 그니까 어떤 분들은 여기 김씨가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다는 사람도 있고, 제가 알기로는 일본인 두 사람이 살고 있다고 하는데...일제 강점기 때 일본 쓰시마해에서 오는 배에 뱃길을 열어주기 위해서 지은...그 분들이 목적이 저 등대라. 그래야 이쪽으로 들어올 거잖아. 일본 애들 지도로 저 등대가 생긴 걸로 알고 있어. 일본 강점기 잔해 없애자 우리나라 붐이 한창 있었죠. 그때 허물었어요, 허물고 다시 지었어. 벼락을 맞아가지고 얘가 작살이 난거야. 낙뢰를 맞아가지고 얘가 한 번 더 부서졌어요. 그래 해서 3번째 지은 모습이 저 모습이야.”

일상생활

더 이상 물질을 하지 않는 해녀들.
소 매물도의 현재 모습. 남해레데코와의 갈등

소매물도의 현재성에 주목하다. 남해레데코와 주민들간의 갈등. 외지에서 온 펜션주인과 민박을 운영하는 섬 원주민들간의 보이지 않는 신경전, 정겹던 섬 풍경이 사라지고 삭막함이 감도는 소매물도의 현재 모습에 사람들은 상처받고 안타까워하고 있다, 섬은 주중, 주말 할 것 없이 관광객이 넘쳐나는 실정이지만, 감당할 수 없는 쓰레기와 물 부족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상태, 통영시에서도 적당한 해결책을 강구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섬과 섬에서 터전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리고 섬을 찾는 관광객들 모두가 만족하는 소매물도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떠한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일까?

“그러니깐 지금 사람이 너무 많잖아. 그렇다고 우리가 시내 가서 살 필요는 없잖아. 옆에 옆 마을에 장사 안하시는 할머니들 계시니깐 그쪽에서 미역이나 해산물 이런 거 받아와서 팔고, 미역도 소 매물도는 농협에 파는 건 없어요. 예전에 마산에 경마상이라고 아직도 있어. 그 전에. 2년 전에 그 옛날에는 다 용마상에 어시장에 가면은 미역 파는 데 있어요. 그 어시장에 가면요, 건어물하고 미역하고 건어물 홍합 팔고 하는 데가 쭉 있어요.” (이석재)

“그니까 당금은 팔러가고 저희 소매물도는 미역을 캐서 팔 일은 없지. 여기서 관광객을 상대로다 팔아서. 예전에는 그거를 한꺼번에 쳐뿌면 목돈이잖아, 그니까 한꺼번에 싸게라도 한꺼번에 처분했었는데 지금은 내가 포장만 좀 해가지고 길거리에서 팔면 다 팔리니까. 괜찮은 가격에, 굳이 다른 판로를 찾을 필요가 없는 거지.” (김정만)

“원래 많이 했는데 요즘은 원래 미역이 특산물, 매물도랑 미역. 관광객들이 워낙 많이 와가 미역 채취할 시간이 없다. 미역 채취할 시간에 파는 게 나으니까. 장사가 더 잘되니까. 그면 저쪽에서 캐신 미역 이쪽에서 파실 수도 있고. 미역은 요즘은 여기는 장사를 하기 때문에 잘 안 해. 예전에 관광객이 없을 때는 특산물이 미역이니까 미역만 했지.” (이석재)

“남해레데코 대표가 땅을 사요. 그 인제 발전을 시킬라고 하다 보니깐 그 지금 여기 어촌 계장이 김정현씨, 유일하게 안 판 사람이잖아. 그러니까 이게 외도처럼 오리지날 남의 게 되야지 발전할 수 있는데, 그게 안 되잖아. 그러다가 쭉 오다가 5년전에 남해 레데코 이사가 바뀌어. 바뀌면서 서서히 시작을 할라고 하잖아 그런데 김정현씨가 걸리거든. 김정현씨가 가지고 있던 게 이거 땅이 남해레데코 직원으로 있으면서 자기 지분을 좀 받은 게 있는데 그걸 차일분씨가 브레이크를 걸기 시작하지. 그러면서 지금 현재 이 땅, 매점하는 땅, 아까 할머니하고 앉아서 이야기한 데, 그 집하고 밑에 바로 촌집 2개도 여기꺼거든. 그걸 먹을라고 하니까 안 먹히거든 잘. 그러는 사이에 남해 레데코 땅위에 사는 주민들이 다 팔았는데 당대까지 산다는 조건이 걸려있거든. 고 대까지만 그러면서 동네 주민들을 움켜쥐잖아, 말을 안 들으면 내보낸다,” (이석재)

“근데 관광지가 되니까 돈이 되다 보니까 나가기 싫은거야, 말 잘 들어 인자. 그러면서 김태호씨란 사람을 직원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아까 강봉율씨 이장으로 있을 때 짜르잖아. 어떤 도로가 나고 화장실이 생기고, 개인 땅이란 소문 때문에 추진을 못했는데 동네 주민들이 자꾸, 동네 주민들이 원한다. 시에 다가 건의를 하잖아. 그럼 시에서 해줘야 되는구나, 시 예산을 들여서 하는 거지. 어처구니없는 그런 일이 생기는 거야. 그래서 전 이장을 짜르고 김태호를 시켰는거야. 어디 어촌에 가서 들어와서 바로 이장하는 어촌이 없어.” (이석재)

“그러면서 아참 김정현씨가 소매물도 절반을 사갔어. 15만평 중에 10만평을 사가, 매입을 해버려. 그러면서 땅 저거 김정현 씨 땅이잖아. 현재. 매입을 못하게 했어. 간판을 걸잖아 소매물도에다가 땅이 반쪽을 났는데 남해 레데코 거라고 간판을 걸고 몬 하잖아, 땅 팔고 나간다고 할 수 없고 이장이 자꾸 시에 가서 어필을 하잖아. 전기도 그렇고 수도도 그렇고 동네 주민들이 혜택을 보는 게 없다, 소매물도는 더 이상 시하고 관광객들도 이만큼 유치가 되있는 상황에서 당신네들이 신경을 안 쓰면 나는 시를 씹을 수 밖에 없다. 40만명 들어오는데 그 통영시에 시너지 효과라는 게 장난이 아니거든. 1인당 10만원을 잡아도, 여기와서 쓰는 게 아이고 통영시에서 어 그만큼 쓴다고 하면은 40만이면 어마어마한 돈이라. 거기에 비하면 소매물도가 소매물도 주민들이 받아야 할 편의는 턱 없이 부족하고.” (이석재)

“민박 할 수 있는 가구 수가 정해져 있다. 오늘 같은 경우 한 3천명 이상 왔을 건데. 대락적으로 3천명 이상 왔을 건데 거기서 1/10만 숙박을 하고 나머진 다 나가요, 잘 데가 없으니까 자더라도 문제지, 물도 없고 전기도 그렇고. 여기 보면 음식쓰레기 있잖아. 이거 다 어디 가겠냐고, 관광객이 들어올 때는 두 손 가득해가 오는데 나갈 때는 빈 몸으로 간다고. 그러고 보면 소매물도가 지금은 좋다고 홍보를 하지만 나중엔 난지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소각장은 불법이어서 시에서 못 해주잖아. 그러면 회수를 해가야 되는데 회수도 안 해가잖아.”

“통영시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게 해주는지.. 올해는 내가 봤을 때 70~80만 정도 될 거 같은데. 대략적으로. 지금 통영 케이블카가 적자라고 하거든요. 통영 케이블카가 한 500억을 들여가 지었는데 적자라고 하던데, 소매물도는 돈도 안 들였는데 통영이 돈을 벌어들인 돈이 상당하단 말이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주민들을 위해서 좀 해주면 안 되냐. 지금 그림을 봤을 때 펜션을 위해서 움직이거든. 주민들도 혜택을 좀 봐야되지 않겠느냐, 내 입장에선. 자꾸 펜션 위주로 혜택을 줄 거 같으면은 이장으로서 나는 지원 안 받겠다 이 말이라 우리 알아서 하께. 왜 지원을 해주라고 하는데 말을 바꾸냐, 말이 글차나 관광객을 위해서..전기가 들어왔어, 도서낙도 지역에 주민들을 위해서. 급수선이 물이 도서낙도 지방에 주민들을 위해서 주는 건데 말을 180도 바꾸잖아, 관광객을 위해서라고 하니까...캄 좋다 너네는 관광객을 위해서 해야된다, 그럼 하루에 급수선이 두 번 오든 세 번 오든 내 집에 민박있는 관광객을 위해서라면 와야 되는 거 아이가. 거기에 발을 못 맞추고 있잖아. 관광객을 위해서라면 급수선을 계속 대줘야 할 거잖아, 그 2주에 한번 하고 있는데, 약속으론, 조 오늘 물이 뚝 떨어지면 내일이라도 대야 되잖아 관광객을 위해서. ”

“전기부분도 싸운 게 그건데, 전기가 예전에는 40키로? 뭐 40키로짜리 한대를 가지고 하루에 12시간 그거를 하루 종일 돌려버리면 애가 먹통이 되버리니까. 껐다가 켰다가 계속 저녁때는 껐다가 식사시간 되서 켰다가, 점등했다가 12시 되면 끄고 .그라고 아침에 잠시 아침밥 때 그때 한 두 시간 켜주고 이제 그런 식으로 했거든, 전 이장이 지금 앞선 이장이 오면서 130키로짜리 두 대를 풀로 돌리. 근데 펜션에서 80키로 써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촌에 있는 사람들은 전기 쓰는 양은 똑같단 거지. 카면 130키로로 늘어났다면 우리도 전기를 더 많이 써도 되는 거잖아. 근데 통영시가 이번에 바꿨는 게 동결을 시켰거든. 지금 현 그 전기를 쓰는데서 동결을 시키겠다. 전기 많이 쓰는 집은 통영시에 허락을 맡고 써라, 이말이거든. 그래서 내보고 싸인을 하래.”

“그 내용이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하는 분들이고 하니깐 시에서 와가지고 하라고 하니깐 하는 거지. 펜션입장에서는 자기들 해도 손해를 볼 거 였거든. 그래서 하는거고. 동네주민들은 뭣도 모르고 통영시에서 관리를 한단다, 거기에만 포커스를 맞추고 아 통영시가 하는데 내가 따라가는 게 맞겠다 싶어가 다 싸인을 해주고 내같은 경우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쓰는 건 똑같은데 전기 발전기 용량이 늘어났으면 내가 전기를 더 써도 상관이 없는 거 아니야. 지금 이 상태에서 펜션만 전기를 다 쓰는데, 펜션은 이미 전기제품 넣을 만큼 다 넣었다 말이라. 그서 동결을 딱 시키면 주민들은 단지 전기세 내고, 전기세 이때까지 안냈는데, 24시간 불법으로 밖에 안 되는거라. 소매물도가 옛날부터 주민들은 발전기가 재산이다, 시에서 해주는, 고맙잖아. 저게 내가 전기제품 하나 더 가면 저기가 무리가 가잖아, 현재까지 그 발전기 무리가 가는 걸 신경써가지고 가전제품 못 넣는거야, 무리하게. 고장나면 나 하나때문에 동네 주민 모두가 피해를 보는건데. 펜션은 그런 거 신경 안하잖아. 내가 전기 양을 늘리면, 통영시에 전화하면 부풀려주겠지. 관광객을 위해서 생각 차이가 아예 틀립니다.”

예전 아이들의 놀이. 해녀 엄마를 기다리던 아이들의 동굴 고라개

해녀엄마를 둔 아이들에게 고라개는 아이들만의 놀이터였다. 자갈밭 투성이인 고라개. 지금은 붕장어가 많이 낚여서 낚시 명소로 이름 떨치는 고라개는 그 옛날 소매물도 아이들의 소꿉놀이 장소였다. 물질하고 온 엄마를 위해 피워놓은 모닥불을 피우고 어두컴컴한 동굴을 탐험하며 모험심을 키웠던 소매물도 아이들.

“고무줄도 하고 공깃돌 놀이도 하고, 학교 소풍은 등대 넘어가는 거. 등대 내지는 등대 넘어가는 곳 있잖아요, 고쪽으로 운동회도 하고 내 때가 운동회 학생이 7명이었어. 운동회하면 동네 주민들 다 올라오잖아. 애들 운동회가 아니고 어른들 운동회. 그런 식으로 단합회 하고 그랬어.” “고라게라는 바다에 동굴 있는 데. 저희 어릴 때만 해도 배가 없었어요. 있어도 노 젓는 배라. 지금 여기 앞에 파도 많이 치잖아요, 좀 더 정상가시면 여기가 파도치면 북풍이거든, 여기가 남쪽이잖아. 여기는 파도가 안 일어. 어머니들 물질은 생계니까 해야 되잖아. 여기 가서 물질 못하잖아, 끼고 넘어 가는 거라. 넘어갈 때만 이 길로 가는 거고. 가파르니까 여기 내지는 여기를 해야 되는데 여기를 하는 거라. 등대까지. 여기를 갈려면 고개를 넘어가면 되고. 이쪽은 물질 할 수 있는 데고, 있어도 해녀들이 내려갔다가 올라갔다 해야 되는데 그런 장소가 없는 거지. 해서 여기는 마을 앞에 파도 안 칠 때 여까지 가는거라. 빙 둘러서. 헤엄쳐서 가는 거라. 그땐 배가 없으니까.”

“여기 가는 길은 험해요, 길이. 그니까 요따만한 자갈들이거든요, 자갈밭이니까 보통 여게 이리 볼록 튀어나온 게 보면 여 동굴 같은 게 있는데 이렇게 깊진 않애, 어머니들 기다리는 동안 우리끼리 노는 거지. 그니까 엄마 올라올 때 갈 시간 쯤 되가꼬, 낮에 나무해가지고 불 피워놓고. 불 우리가 인제 애들이 피워 놓는거야. 엄마 추우니까. 그러면 여기서 막 뛰어놀잖아 인제. 동굴에도 들어갔다가, 니가 먼저 들어가봐라~ 무서우니까. 그기 이 동굴이 하나 웃긴 게 통로를 보면 이렇게 해갖고 여기로 물이 들어 와. 여기는 자갈밭이고. 여기로 들어가. 뽁 들어가면 물이 자갈밭이 이렇게 되있는 거지. 이기 물이 동굴 통로가 있는데 물이 팍 치고 들어오거든. 동굴에서 듣는 자갈 소리. 자갈 굴러가는 자갈 소리 도도록 하미. 그 소리가 동굴 안에서 울려.”

“그리고 왠만한 자갈이기 보다 이만한 돌들이야. 동그란 돌들. 여기 불 피우면은 막 한참 멀리 떨어지잖아. 그 몽돌은 태우면은 빵 터져 이게. 오리지날 딱딱한 까만 몽돌이 아니고 약간 깎여서 그냥 일반 돌이 깎여서 동그랗게 됐는 몽돌들인데 약간 그 그건 좀 약하지. 강성은 좀 약해. 그래가지고 우리가 불 피아놓고 있다가 돌들이 빵 터지면서 돌들이 짝짝 튕겨져 나오잖아. 근데 뭐 한 번도 다친 적은 없으니까. 그리고 여기서는 실질적으로 수영을 안 해봤고. 자갈밭이니까. 여기가 열목개라고 하거든 자갈밭에. 1박을 하게 되면 볼거리도 많고 사람들과 정겹게 즐겁게 이야기도 할 수 있고 여름에 오면은 랜턴들고 와서 고동도 주울 수 있는데,”

풍랑주의보가 내려져야 일손을 놓는 해녀 할머니들

주중, 주말할 것 없이 사시사철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소매물도. 마을에 해녀들은 물질을 그만두고 관광객들을 상대로 해산물, 김, 파래, 방풍나물들을 팔기 시작했다. 배에서 내리는 항구 입구 또는 등대섬 올라가는 길목에서 좌판을 벌이고 손님들을 맞이하는 해녀들. 밀려드는 손님에 눈코뜰새가 없고 남들 다 쉬는 주말이면 더욱 더 많은 손님들이 몰려오기 때문에 좌판을 접을 수 없다. 이런 해녀들이 쉴 수 있는 때는 풍랑주의보가 내려졌을 때. 북쪽에서 서맛바람이 블어오기 시작하면 바다 생활을 오래한 해녀라면 다음날 풍랑주의보가 내려질 거란 걸 예측한다. 해녀들은 바다날씨가 심상치 않다 싶으면 다음날 아침 일찍 장사를 접고, 충무로 나가서 목욕도 하고 머리도 하며, 그동안의 묵은 스트레스를 푼다.

“얼추 다 팔아졌어 많이 안 남았다고 이제 짐도 한 박스 반 밖에 없고 저저 많이 팔아서 쪼금밖에 없고 하니까 내일은 충무를 한번 가볼까 싶어. 충무에 집이 있어. 충무가서 한 이틀 일 있으면 장사를 해야 될 거 아니가. 풍랑주의보 온다 그러면 배가 안 들어오잖아. 그러면 오전에 여기 사람들 다 나가. 나가서 충무가서 목욕하고 쉬다 오고 그래. 주말엔 여기 손님들 많이 오고 하니깐 못 나가지. 풍랑주의보 뜨고 하면 여기 섬에 사람 없다.” (김연화)

노동, 경제,교통

생업. 통영 장, 척박한 섬에서의 생활

“방마다 사람이 가뜩가뜩 차가 살았어. 가지가지 소도 키우고 염소도 키우고 바다에 가서 낚시도 하고 멸치도 잡고 또 뭐 그물도 해가 고기도 잡고 이래 살았어. 그래 살았는데 농사도 농사를 많이 식구가 많으니까 먹을 게 많이 들잖아요. 시내나가서 통영읍에 나가서 매일 그러는 게 아니고. 요즘같이 쾌속정이 있어가지고 매일 같이 시내 나다다니고 하지만. 여기는 보통 열흘 만에 보름 만에 한 달에 한두 번밖에 안 갔어. 장배라고 하는 게 있어가지고.”

“장배라고 장에 가는 배 며칠 만에 한 번씩 장에 가면 바람 불면 못 나오고 돛단배고 노를 저어서 가는 배기 때문에. 시내 나가서 바람 불면 못나와 오늘 같은 날은 꼼짝 못해 꼼짝 못하고 시내 가서 묵혀가지고 없는 돈에 밥 먹고 여관 생활하는 그것도 어려워. 빨리 들어와서 집에 있어야 돈이 안 들텐데 밥 사먹어야 되제 방값도 줘야 되제. 그땐 진짜 어려웠어. 그래서 여기서 갈 때 뭐를 가져가냐면 고기 같은 거 잡은거 소금에 절여가지고 가기도 하고 미역을 말려서 싣고 가기도 하고 또 홍합. 옛날에는 홍합을 많이 따서 삶아가지고 엄청 여기 많았어. 그걸 삶아서 꼬챙이에 꼽아서 그걸 한배 싣고 나가면 올 때 또 곡식하고 싣고 오니까 올 때 또 한배라.”

“그래서 가서 쌀하고 바꿔오지. 옛날에 쌀 귀하지 어쩌다 쌀 구하지 거의 다 보리 쌀은 쪼금 뿐이라 보리 열가마면 쌀 한가마가 힘들었어. 그렇게 살았어. 차츰차츰 살다가 고향을 떠나는 사람도 있고 여기 살다 안 되겠다 하고 나가는 사람도 있고.”

공동체/신앙

어촌계 소매물도 미역바다를 나누는 방법, 지형별 이름이 붙여진 소매물도 바다

지형별 이름이 붙여진 소매물도 미역 바다. 14개까지 나뉘어졌던 미역바다가 점차 미역을 캐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자 그 수도 줄어들고 있다. 소매물도 미역 바다를 보면 매물도에서만 쓰는 바다 용어를 배울 수 있다.

“대매물도도 마찬가지잖아. 미역을 채취하게 되면, 채취하기 전에 쓸이질을 하기 전에 미역 구역을 나누거든. 구역은 옛날부터 지정됐는데 표지가 많이 있어. 여도 참 신기하다 12군데가. 이게 매년 다른데. 아 이거는 10 군데로 돼 있네. 이게 다 이천팔년 이천구년 다 자기 자리가 있어.”

“남매바위 넘어서 치가 있어. 대 매물도 맞은편에 치 거기부터 일번이 되거든. 거기가 시작이고, 직서서편은 거기부터 시작이고 직서서편은 해지는 쪽 여울목이라고 하는데 아까 물 빠지는 데 여울목이라고 하는데 아까 등대 자갈빛 빠지는데 거기서 일번으로 해가지고 마을 쪽으로 오는 거라.” “서편은 등대에서 마을로 들어오고, 등대 동편은 어디고. 여부터 어디까지고. 대문강정(글씽이동굴)석치부터 등대 동편은 여기라 요로케 된데 여기 끝엔데. 마을 쪽 여기부터 일번으로 해가지고 콧구멍처럼 생긴데. 이번은 여기서부터 동편으로 돌아가는 거라. 감둑녀라고, 여기 뚝 떨어진 섬 이걸 일번으로 해서 돌아가는 거라.”

“이게 매년 자기 구역이 틀려. 이천구년도 자기 구역이라 이천 팔년도 틀리지. 올해 십년. 이게 가르는 것도 구년에 바다를 가르면 십년 째 해먹는 거잖아. 올해는 안 갈랐거든. 작년에 갈라야 되는데 올해 안 갈랐다고. 이게 원래 우리 써리질을 10월달부터 하거든. 올해 십 일 년도지요. 이천십년도 시월 달에 자기 구역을 줘야 되는데 안줬잖아 적힌 게 없잖아 올해 안했거든.”

“이게 오랜 전통이다. 옛날부터 지금은 사람이 적으니깐. 적을수록 구역이 많아지잖아. 크게 늘어놨잖아 구역을 가르는 것도 그때만 해도. 99년도 같은 경우는 14번도 있어. 2002년도 까지만 해도 14개 정도 있었지. 그때부터 2008년부터는 줄어들잖아. 근데 이제는 미역 더 이상 할 사람이 없으니깐. 이제 내년되면 더 줄어들지. 일번부터 십 삼번까지 번호를 적잖아. 여기도 대 매물도처럼 제비뽑기 하고.”

“여기 재미있는 지명이 많은 게. 목 물 넘는 턱 다랑. 목이라는 건 섬과 섬 사이에 가운데를 목이라고 하거든. 등대목이라고 하는 그게 그거잖아. 섬하고 섬 사이에 물이 지나가는 그거. 그래 조류가 가는 데를 목이라고 하거든. 턱이라고 하는 건 납닥한 돌. 여기에 돌과 돌 사이에 물이 가는 데를 납닥한 돌이 있잖아. 그럼 턱이라고 하거든. 다랑이라고 하는 건 갯바위 암벽 같은 거. 그러니깐 섬과 섬 사이에 물 이 가는 데를 목 물 넘는 턱 다랑이라고 해.”

소매물도 동제이야기

“요기 산에, 저기 나무 있는데 저기 거기서 정월 초하루 날이 되면 집집마다 밥상을 이고 제사를 모시고 옛날에 제사 모시는 데는 저기 저 나무 있잖아. 일 년에 한번씩 제일 동네서. 깨끗한 사람을 빼가지고 그 사람이 제사를 모셔. 그때는 저 양밥, 사람 죽은데도 못 간다. 잘못하면 죽기도 하고. 저기 저 산신령이 참 영험해. 지금은 밥상도 안 갖다 놓고.” (김학순)

“바다에는 맨날 배도 부리고 이라면 용왕도 먹이고 우리 집에는 쪼깨난 보트밖에 없다. 밑에 있을 때에는 정월 초하루, 추석날 되면 밥을 꼭해가. 여기 올라온 이후로 사년차 네. 뭐 하도 안 한다. 나이도 많고, 정월 초하루날 고마 우리 제사 모시고 나면 밥상 갖고와서 소원 빌고 오고.” (김학순)

“여기 당금이랑 대항처럼 여기도 당산이 있거든요. 그게 옛날에는 제를 지낸 게 1년에 두 번. 추석하고 그리고 정월 초하루. 그거는 당산 지낼 때는 인자 내가 사업을 한다던지 잘 되기 위해서는 책임을 맡아가 하는 사람이 있어요. 돌아가며 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 아버지도 한번 했고 동네 사람 전부 다 지냈지. 두 번 세 번 한 사람도 있고. 그거는 내 마음이 깨끗해야 장사가 잘 된다던지 집안이 잘 된다던지 그렇게 편안해야 하는 거지요. 한 겨울애도 전깃불 없을 때라 그때는 저 곁에가 우물이 나는 데가 있어요. 그 겨울에도 얼음을 깨가 샤워하고 몸을 단정히 해가지고 가다가 호롱불로 그믐달에 올라가야 되기 때문에 가다가 돌을 밟아서 넘어지면 다시 내려와서 샤워하고 가야되요. 그 정도 마음을 단정하이 해가 올라가야 되.” (김정만)

“저기 바위가 큰 게 하나 있는데, 약간 울타리 져가지고 딱 밥을 옹기로 해가지고 밥을 하게끔 그렇게 되어 있어요. 저기서 밥을 쌀을 씻어 올리는 거라.” (김정만)

음식

매물도의 음식(제사 때 빠져선 안 되는 음식), 매물도 별미 거북손 이야기. 자급자족이 가능했던 생활

소매물도 사람들이 멀리서 친척이나 가족들이 오면 밥상에 빠지지 않고 올리는 별미! 거북손, 이곳 말로 보찰이라고 하는 거북손은 일반 패조류처럼 양념을 하지 않고도 먹을 수 있어서 낚시 할 때나 술 안주로도 인기만점이다. 최근 1박 2일에서 등장해 더욱 인기를 얻은 거북손! 소매물도 곳곳에 바위 틈새 사이에 거북 손 모양처럼 딱 붙어있는 거북손! 납닥한 칼만 있으면 손쉽게 한 바구니가 금세 채워진다.

“아 여기는 제사 때 딱 정해졌어요. 고기는 참돔 올라가야 되고, 그라고 문어 올라가야 되고. 그라고 우리 건어물 중에도 뽈락, 뽈락을 약간 말려가지고 배를 갈라가 이렇게 반을 쪼개가지고 이렇게 얹지가 놓았어요. 꼭 올라오는 거 아까도 얘기했지만 홍합, 홍합말린 거를 그거 뭐라더라 오가재비? 대나무를 깎아가지고 꼬치처럼 끼워서 그거를 끼워가지고 홍합을 날거로 따가지고 끼워가지고 햇빛에 살짝 말린다고 그라면 그걸 요 정도 잘라가지고 제사상에 올라, 그게 꼭 올라갑니다.” (김정만)

“요즘도 올라갑니다. 안 빠집니다. 그거하고 고기하고 안 빠진다. 그 나머지는 과일하고 인자 거의 비슷해. 그게 왜 그런가 내가 생각해보면 옛날에 홍합이 많이 났거든요, 지금은 인자 잘기라도 옛날에 하던 방식으로 올라와.” (김정만)

“그리고 나물은 그 우리가 제사상을 지내면 밥이 올라가잖아요. 밥 옆에 나물이 이렇게 뿌리, 톳, 미역, 콩나물, 두부 이래가지고. 우리 경상도에서 나는 나물 있지요, 두부하고 여가 하는 거. 그 나물이 밥 옆에 따로 올라가요.” (김정만)

“내가 볼 때는 요리할 게 하나 딱 있어. 거북손가지고 하는 게 있어. 초무침 많이 해 먹는데. 근데 그거 힘들다. 매일 따러 댕기야 되는데, 이 바람 부는 날 어디가 딸껀데. 한꺼번에 많이 날 좋은 날 따가지고 얼려서 냉동해가 팔면 되긴 하는데 그게 하루 지나면 상해. 그래서 매일 따러 댕기는 일이 예삿일이 아니라고.”

“홍합처럼, 조개처럼 그게 씹는 맛이 오징어 맛이라. 오징어 살 매로. 쫀득쫀득하고 맛있다 그러니. 나가 볼 때는 손님들 반찬 상에 나가는 것 중에 제일 낫다. 거북손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손님들 쭉 보면은. 다 맛있다더라. 내는 인자 배를 하면서 손님들 보면은 고기 딱 끓다보면은 손님들이 입가심으로, 요기는 인자 회가 나가면은 찌개다시라 하나, 이런 안주가 안 나가잖아, 그래서 거북손을 주거든. 그럼 좋다해.”

“보리밥 먹고 살고, 보통 젓갈, 자리돔 젓갈. 갈치 젓갈 있고, 멸치 젓갈 있고 그 다음에 밭에서 나는 거. 배추, 무 , 시금치 양파. 그 당시에는 사 먹는 게 없어요. 무조건 자급자족이고. 근데 크게 뭐 농사라는 게 아니고 내가 먹을 만큼만, 텃밭에다가 키워서 집집마다 조금씩 텃밭을 그래.” (이석재)

특산물

쓸이질 때문에 한 맛 더 있는 소매물도 미역

“대매물도 마찬가지잖아. 미역을 채취하게 되면, 채취하기 전에 쓸이질을 하기 전에 미역 구역을 나누거든. 구역은 옛날부터 지정됐는데 표지가 마이 있어. 쇠 조각 이런 게 있어, 이거 가지고 돌에 불빛이 나게끔. 깨끗하게 없애야 미역난이 그래 붙어야. 오리지날 자연산입니다. 미역이 좋아요 해초곁에 써리질을 안하고 미역을 붙은 거는 미역이 못생겼어 똘똘 말렸어. 그래 한 거랑 안 한거랑 천지차이라. 그래서 값을 한값 더 쳐주는 게 소매물도 미역이라.” (김정만)

“당금은 안합니다. 대매물도 미역이랑 여기 미역이랑 틀립니다. 당금 미역 같은 경우는 6만원 하면 여기는 9만원 정도까지 받아. 여기 미역이 더 좋지. 특히 등대 동편 등대 주위가 제일 미역이 잘 된다. 파도가 세고 조류가 세기 때문에.” (김정만)

생애사

혼자였던 엄마를 위한 소년의 지게질. 소매물도의 유년시절을 기억하다 - 이석재 이장님

“소매물도가 보면 앞쪽에 파도가 치고 뒤쪽에 안칩니다. 꼭 보면 그래요.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으면 어머님들이 싹 지나가 그때는 하루 종일 공부가 안되요. 왜? 그때는 물질하러 가도 배가 없으니깐 앞에 파도가 치니깐 왜 뒤에 파도가 안치니까 물질하러 가고 거기에 가시는 거 아버님은 어차피 시내가 있는 사람이니까. 장남이자나. 초등학교 대봤자 키 요만해. 어머님들 창가로 해녀 복 입고 가면 죽는 거야 하루가 근심이야. 저기서 어떻게 성게 따고 어떻게 지고 올까. 따는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지고 올까. 내가 지고 올까?”

“마을 앞에서 하면 여기서 얼마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마을 뒤편에 있지 않습니까. 어머님 납이 10kg입니다. 고무 옷을 입고. 어머님은 물질만 하는 그것만 해도 힘든 거야. 하루 종일 물질하고 이고 오는 그것만 해도 그러면 공부가 하나도 안 돼. 마치면 가방 던져 놓고 아버지 지게를 들고 가요 . 갈 때는 지게를 빈 거 올라갑니다. 근데 올라가는 거는 안 걸리니까 내리막길은 앞으로 들고 메고 갑니다. 지고 가면 뒤로 다 걸리니까. 그 다음에 캠핑하셨다는 거의 그게 이 성게를 한 망태 힘 닫는 데 까지 갖고 오는 거야. 아들 생각 없어. 거의 학교까지 기어갑니다. 비탈진데다가 학교 뒤편에 길이 있었어요. 더 가파른데 거의 기어 올라가자나.”

“동생은 납 하나 매고 엄마는 고무 옷 ,슈트 복 이고 올라오면 장남이라고 가오가 있잖아. 다 실어. 거의 기어 올라오잖아요. 학교까지 올라오면 암담합니다. 어떻게 내려갈까 . 갯 걸음 거의 뒷걸음입니다. 어차피 이거는 안지면 못 드니깐. 그때부터는 올라왔던 길을 거꾸로 올라가 뒤로 가야 돼. 안 그러면 계단 툭 내려가면 지게가 앞으로 쳐 박히니까. 뒤로 가야 돼.”

“그렇게 해서 집에 도착하면 하루에 전기가 3시간 들어오는데, 해지기전에 후딱 밥먹자나. 그리고 초 켜놓고 성게 까자나. 성게 까고 나면 전교생 7명이라고 했잖아. 전교생. 7명 손가락이 다 보라색으로 물이 들어. 내일 아침에 학교 오면 다 똑같아. 보라성게. 장갑 끼고도 성게는 가시, 최고 쉬운 거 까는 거 동생 시키고 동생 까면 내가 파 넘기면 똥 발라내고 어머니는 딱 성게만 골라내고.”

“새벽 3시 나오잖아. 저녁밥 먹고 밤새 까기 시작해서 나중에 정리 끝나면 3시. 학교는 그담날 가지. 안 가진 못하지. 왜. 선생님 집이 요 밑이니까. 올라가면서 애들 다 데리고 올라가니까. 선생님이 올라가면서 야 부르면 가방매고 나가요. 저 같은 경우에는 제일 유리했죠. 제일 위에 있으니까. 내 할 꺼 다하고 따라 올라가면 되니까. 그러고도 모자라서 점심 먹으러 집에 내려오고 뭐가 그렇게 신났는지 학교에서 또 종이 있잖아요. 옛날 종이 그거 땡 하면 다 들려요. 동네까지.”

“방학이면 섬, 휴가면 섬 계속 왔다 갔다 할 수밖에 없는 게 도시생활 하지만은 부모님이 매일 걸리지. 매사에 하루하루 부모님이 걸리는 거야 마음이.”

“그니까 오죽하면 와이프하고 합의를 해서 여기 있으면 식구가 걱정이 되지만 그건 덜해. 부모님이 있는데 땅을 다 팔았는데 얼마나 눈치가 보면 살까. 20년 전에 들어왔으니깐 땅 파는 건 알고 회사가 거기에 대해서 못 사게 구는 것은 사실이거든요. 거의 외지 사람이 샀기 때문에 그니까 부모님이 오시면 하소연할 때가 저밖에 없으니까. 바디 랭귀지니깐 자식 밖에 못 알아들으니까. 100프로 통영에 있으면 이런 저런 이야기 하고 싶은 거야 누구한테 말 못하니까. 속에 맺힌 건 많고 방학 때 오면 우리 부모님 괴롭히는 사람한테 내가 울타리가 되어야 되지. 그렇게 해 놓고 나가면 또 신경이 쓰이는 거야. 죽겠는 거야.”

“저때 부모님들은 다른 거 없어. 우리 부모님 아주 단순한 게 뭐냐면 내가 고등학교 중퇴인데 다른 집에 가면 학사모 쓴 자식들 사진이 쫙 있어. 우리 자식도 학사모 쓴 걸. 그때는 그렇게 못 할 것 같아서 안 했다 아닙니까. 안방에다가 그걸 몇 년 걸려 있어, 결혼하니까 다 결혼사진. 근데 지금은 싹 바뀌자나. 손자사진.”

소매물도 최고의 훈남! 이석재 이장님~ 30대의 나이에 말을 못하시는 부모님의 울타리가 되고자 혼자 귀향한 효자 아들. 와이프와 자식이 있는 부산과 충무, 소매물도를 왔다갔다하고 있다. 섬 원주민들을 대표하여 섬 사람들의 고충을 통영시에 알리고 있다. 쿠크다스 cf.영화 파랑주의보, 남자 태어나다. 소매물도를 배경으로 찍은 영화와 cf에 출연한 자칭 소매물도 스타라는 이석재 이장님! 유년 시절 전교생이 7명뿐인 학교에서 골목대장 역할을 하며 개구진 유년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통영으로 돈을 벌러 나가자 혼자였던 엄마를 위해 진 지게, 지금도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엄마를 위해, 자신이 태어난 고향인 섬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60년 소매물도의 지나온 과거를 온 몸으로 겪어낸 김학순 할머니

“거제도 거제 배오고가고 하는 그 짝동네 시집왔어. 내가 결혼을 했는데 시집을 와서 보니까 식구가 열서이라 제일 우리 집이 사람이 많았어. 시아버지 육형제가 여기 다 살았다. 우리 시어머니가 구남매라.”

“우리는 아저씨가 계시니까. 여 바다에 미역, 이런 홍합, 자연산 까치 톳나물, 하야이 우뭇가사리 전부 여기서 나는거 아니가. 그때는 전부 우리 아저씨가 해녀들 제주도에서 데리고 와가지고. 그때는 우리 여기 해녀들이 작업할 줄 몰라가지고 저 사람들 다 시집와가지고 배워가지고 한다. 우리 조카는 여기와가지고 배웠지만 우리 딸내들은 그런 것 또 안했거든. 그래서 해녀들 델꼬 와서 하고 나면 제주도 가고 내년에 또 오고 그래가지고 그때는 민박도 안하고 이런 게 어딨노 솔작이 농사만 지어먹고. 하이고 야들아 우리아저씨는 또 일찍 돌아가셨다 일찍 돌아가셔가지고 아들델꼬 산다고 우리 아저씨가 딸 둘 시집 보내놓고 돌아가셨다. 오십 아홉에 죽었으니까 환갑 진갑도 못 지내고.”

“어 그래 전주라고 옛날에 전주라고 해녀 돈 주고 델꼬와서 작업해가지고 보내고. 그래그래 살고 아들이 또 많아가지고 아들이 다섯이라. 그래서 옳게 공부도 못 시켰다. 중고등학교만 다 마치고 큰아들도 부산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이제 넷째 아들 해양고등학교 마치고 큰 5톤 되는 배 선장하고 셋째아들은 등대섬에 등대지기고.”

“고구마 농사. 여기 쌀 서 말도 못 먹고 집에 간다 했다 제사 때 우리는 쌀 구경도 못했다 애기 낳아도 .애기 낳아도 쌀밥을 많이 못 먹어 식구가 많으니까 쌀 한 옴 큼 얹어 주는 것도 그것도 밥이 작아가지고 나빠서 한 그릇 밥을 주면 그걸 한참에 미역국하고 다 먹겠는데 그걸 두 번 먹으라고 나는. 인자 한번 먹고 밤에 또 먹고 그래서 밥이 적은거라. 그래 내가 젖이 적어가지고 그때는 우유가 어딨노. 쌀을 갈아가지고 우리 애들 먹여서 키우고 그랬어 말도 못한다 얼마나 고생하고 살았다고 .” “내가 15년을 민박했는데 왜 안하냐면 요집 말고 저 맡에 빨간지붕 다솔이 사는데가 우리 집터라 그랬는데 근데 섬이 팔려놓으니까 그래서 이제 민박을 안 하고 충무도 집이 쪼매한 게 하나 있는데 가기 싫어가지고 아직까지 여기 저 아들이 있으니께 아들이 결혼을 한번 해가지고 실패를 했어 그래서 지금 못 가고 아직 꺼정 나는 아파트가서 가마 못 있겠는거라.”

“처음에 시집와서는 울고불고 못 살겠고 밥을 주면 게워내고 막 잠도 안 오고 그랬는데 아저씨 살아 계실적에는 뭐 애기들 키우고 농사짓고 베 짜고 나는 물질을 할 줄 모르니까 그래 재미 붙여서 살았지 뭐. 그런데 아저씨 돌아가지고 나서는 한참까지는 밭에 농사짓고 안했나. 민박 하고나서는 섬 팔린 지가 19년차인데, 섬 안 팔려서 부터는 나가 첫차 민박을 했는기라. 섬에서 우리 집이 젤로 컸는 거라.” “방이 일곱개라 집도 제일 크고 섬에서 그래서 하다 고만 팔렸따 아이가. 안 팔았으면 될긴데 산장은 안 팔렸다 아니가 팔아서 보증금 다부 내줬다 아니가. 안 팔았으면 될긴데. 우리 집이 또 그 요지택이라가꼬 그래가 팔리니까 보상을. 팔고 나간사람들은 서른여섯가구 중에 본토배기 열한가구 밖에 안 사니께.”

“아예 첫번째는 남해 레데코에서 다 샀는데 첫번사가지고 이걸 어째 안하고 내 묵하놔놓고 우리 민박도 다 돈도 방세를 줬거든 그래 그 사람들이 이 사람들이랑께. 쿠크다스(펜션)는 충무사람이고 등대민박은 안성사람이라 다솔산양 그 사람이 충무 사람인데 여기 살러 온지가 몇 년 돼가지고 그 사람들을 끌어들여가지고. 내려가 팔았다 서울서 온 주주가 하나 있는 모양이라. 그래서 돈을 이 사람들이 주주에 돈을 다 안줬어.”

“그래 우리 조카들이 고랑건너는 저쪽 저거들이 사고 고랑 이쪽에는 집에 몇 채 안돼 빨간 집 한채 빨간 집 밑에 민박하는 집이 두 집 아니더나 세집 아니 더나. 그것만 해도 우리 아들(조카들) 샀뿌이께 저거들이 맥을 못 쓸건데 이래 시비다.”

“만날 소송이다. 저 좌판 벌여 놓은 데를 고발해가. 오늘아침에도 누가 갔는가 모르겠네 한 사람 한 사람씩 다 조사 받으러 댕긴다 카네. 아이고 골치야 나는 여기 있으니까 모르는데 우리 아 갔다 오면 그란다 그러네. 우리 조카들은 옛날 주민들 사는 그대로 살리고 지금은 나가라 들어가라 안하고 그냥 살리고 그것도 저거들이 다 안샀거든 돈이 너무 많으니까 그래서 누나들이 돈을 보태고. 왔다 갔다 하는 조카도 거기도 사정이 있어 그래서 그 사람도 돈을 보태고 사는 사람은 살게 하고 집을 짓는 데는 짓고 그래 한다네. 골 아프다 골 아파.”

“우리가 팔고 살아도 서로 의 좋게 살면 좋겠는데 그래 안하고 맨날 이래가 왔다리 갔다리 하고 뭐 잘못하면 사진찍고 등대 식당이라고 내놨는데 거기 민박하는데는 저 지붕에다가 요 카메라 .그걸 두개나 해놨단데 우리 구판장 아들 잘 모하면 사진 찍을 기라고 그래놨다 카네 .”

“저거들이 못 살게 맨들어 나놓고 나간다고 그란다. 그래도 저기 여기 장로로 살라 카면 안분(원래)사람들 손을 잡아야지, 요 산 줄이 전부 안분(원래) 사람들 기라 땅이 많다고 집도 저기 까만집하고 파란집하고 두채 그 옆에 옛날에 살던집 오두막집 그것도 기제 구판장 그것도 기제 저거 땅 가진 게 많다고. 어 우리는 보고만 있을기라도 너무 시끄러우니까 안타깝다. 우리 아들도 돈을 들여서 해놨는데 서로 조금 양보를 하면 될건데 서로 이래 후비고 파고. 내가 여기 몇십 년이 돼도 내가 넘의 동서들하고도 안 싸워보고 동네 사람들하고도 안 싸워봤는데 섬이 이래 두두려 받치니까 .”

“그래 요래 인제 마른장사만 내가 하고 이카는데 이런 충무 딸이 막내딸이 충무에 있거든. 있는데 손주들 학교에 보내놓고 오늘도 열한시 배로 올거라. 그러면 이제 출퇴근하거든. 인제 오후 세시 반 되면 가거든 장사하다가 지 뭐 가와서 팔고. 그래하면 되는데. 아들은 하지 말라고 샀는데 어제는 부아가 나서 고마마 딸내미 오도 안하고.”

“그래 딸 거 하고 나하고. 돈 많이 버니 나은데 이게 또 밑천이 다 드니까 아유 그래 너무 디면 잠도 안와. 내가조카 집에도 함 못 가본다 이래 돼가꼬. 사람도 상대하고 돈도 내가 무치던 사람이 돼가지고 가만 방에 못 앉아 있다 아무리 아파도 전날만 되면 이래 안 있나 길이 이래놓으니까 사람들이 왔다갔다하고 ”

어린나이에 시집 와 아무것도 없던 살림살이를 일구어 자식들 키우고 시집 장가 보낸 김학순 할머니.

동제, 접장, 매물도의 옛 역사를 기억하는 할머니는 전주(제주에서 데려온 해녀를 데려온 마을 내에서 사업을 했던 사람을 이름)였던 할아버지와 함께 해녀들을 관리하고 착실히 돈을 모았다. 그 돈으로 샀던 집. 마을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가장 큰 집을 소유했던 할머니는 남해 레데코에 집을 판 후 조그만 오두막으로 이사를 왔다.

민박집을 더 이상 하지 못하게 되자 시작한 장사. 등대섬 올라가는 길목에서 좌판을 벌이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에게 방풍나물이며 김을 팔아 생활을 꾸려나간다.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할머니의 장사자리. 그 자리에서 보이는 예전 할머니의 집. 지금은 펜션이 들어서서 할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결혼에 실패한 아들과 함께 꿋꿋이 섬을 지키며 살아가는 김학순 할머니. 섬의 역사와 할머니의 과거는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바퀴같다.

소매물도 홍반장. 그가 이야기하는 섬에서 사는 법. 하얀산장 김정만씨

“집에 떠나고 싶었습니다. 들어왔다 왔다 갔다 하니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깐 엄마가 안 떠날려고 하시는 거에요. 엄마가 아직 정정하시니까 지금 76입니다. 아버지는 제가 4살 때 가셨고, 엄마가 아직 정정합니다.”

“엄마가 안 떠난다 그러니깐 여기 있게 된 거지. 도시 있다가 여기오니까 갑갑해서 못 있겠더라구요. 지금도 못 떠나고 있는데 명절 때도 둘 밖에 없어요. 나도 명절 때도 조카들도 좀 크니까 안 올라 해요. 지금도 못 떠나고 있는데 나도 명절 때 아니면 친구들 만나고 싶어 해도 못갑니다. 차례를 지내서 못 갑니다. 친구를 1년에 3번밖에 못 보거든요. 만날 시간이 없으니까.

“여기서 아무리 심심해도 보고 다니는 게 배밖에 모르니까 시내 나가면 어느 정도 친구는 있고 한데 아파트 생활하면 엘리베이터 누를 줄도 모르제 어느 정도 다녀야 되는데 집에 있다 보니까. 시내 가도 갑갑해합니다. 나름대로 모시고 다니고 하는데 잠만 자다보니까 여기 있다가 나가신 분 들이 빨리 몸이 갑니다.”

“우리 할머니가 지금 중풍 걸려서 누워있거든요. 그게 이렇게 . 우리 할머니 하는 말이 우리 돌아가시면 나가라 살아생전 안 나간다. 갑갑한 거는 있어요. 안 나갈려고 하시니깐. 정 가고 싶으면 모시고 가잖아요. 여행 다니고 그게 아니면 갈 시간이 없으니까.”

“민박하면서 한 가지 얻은 건 그거 밖에 없어. 그러니까 돈보다도 중요한 게 인맥인데 그런 게 좋더라고. 내가 여기 있으면서 경희대 의료 원장을 어떻게 만났겠습니까. 아주 어릴 때 촌집에 있을 때 우연찮게 고기를 이만한 걸 잡았는데 그걸 같이 먹었는데 하룻밤 자게 해 드리고 이만한 농어를 잡아가지고 같이 대접해 드리고 그게 손님한테는 평생 기억에 남아가지고 경희 원장님인데 한번은 도움이 되더라고요 .우연찮게 우리 엄마하고 조카가 화상을 입어가지고 크게 화상을 입어가지고 진짜 떠오른 게 그 선생님이라고. 바로 연락하니까 접수도 필 요없고 바로 가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하찮은데도 그 사람한테는 큰 대접이 됐던 거야. 내가 매일 낚시를 다니기 때문에 내가 대접 할 꺼는 회. 그게 인연이 되었던 거지요,”

매물도 홍반장이라고 불리는 김정만씨. 노모와 함께 마을 구판장을 운영하면서 민박도 같이 겸하고 있다.

정착 4세대, 마을에서 유일하게 남해레데코에 집을 팔지 않은 하얀산장의 주인이기도 하다. 소매물도를 사랑하고 원주민들을 위한 섬이 되길 바라는 김정만씨는 관광객들을 위한 공동화장실 청소며, 발전소 직원이 깜빡 잊고 잠이 들면 대신 연료를 넣고 발전기를 돌리기도 한다.

항상 사람 좋은 웃음으로 민박집 손님들을 다시 소매물도로 찾게 만드는 그는 진정한 소매물도 홍보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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